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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저축은행/대신 이야기

탕진잼, 낭비가 아닌 생산의 재미


‘탕진잼’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소소하게 낭비하는 재미’를 일컫는 것으로, ‘재물 따위를 다 써서 없앤다’, ‘시간, 힘, 정열 따위를 헛되어 다 써버린다’는 의미의 ‘탕진(蕩盡)’에 ‘재미’의 준말인 ‘잼’이 더해진 합성어다.

 

신약 ‘마태오의 복음’ 6장 31절을 보면 예수는 제자를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예수는 하늘의 새를 눈여겨보라며 ‘새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곳간에 모아두지도 않는다’고 했다. 신이 알아서 다 해결해주며, 심지어 인간은 새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다(6장 26절).

 

뒤이어 예수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며 이야기를 맺었다(6장 34절). 이른바 ‘탕진잼’, ‘시발비용(fuck you money)’의 역사는 2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가까이는 30여 년 전의 록 밴드 들국화 역시 ‘(흔히 볼 수 없지만) 내일 일은 잘 모르고 오늘만을 사랑하는 아이’를 찾으며 탕진잼의 로망을 노래했다(2집 수록 곡 ‘내가 찾는 아이’ 노랫말 중 일부).

 

 

 

 

 

‘탕진잼’ 현상은 일반적으로 ’20-30대 청년층의 자조 섞인 소비문화’로 해석된다. 공황에 가까운 불경기, 끝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암연으로 치닫고 있는 것만 같은 저성장의 현실은 20세기의 미덕이었던 ‘저축’이나 ‘자기 계발’을 희대의 난센스로 만들어버렸다.

 

삼포, 오포를 넘어 ‘N포의 경지’에 이른 흙수저 청년(장년, 중년)은 더 이상 ‘돈 모아 집 사는’ 헛된 꿈을 꾸지 않는다. 최저 시급이나 박봉은 아무리 쪼개고 모아야 월세나 대출이자 내기에도 빠듯하다.

 

만화 ‘내일의 조’에서 관장 단페이는 복서 조에게 ‘절망보다 무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 희망을 꿈꾸는 것’이라고 했다. 명민한 21세기 한국청년은 그래서 내일의 희망을 꿈꾸는 대신 오늘의 희로애락에 충실하기로 했다. 편의점에 진열된 가장 비싼 라면과 음료를 구입하고, ‘1천 원 숍’에서 없어도 되는 문방구를 시리즈로 수집하며, 몸이 피곤하면 과감하게 (최고급 세단) 택시를 탄다. 남과 다른, 소중한 나를 위한 ‘사치’다.

 

SNS의 (허세) 청년에게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으로 일컬어지는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한 달에 몇 천원이면 누구나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무손실 음원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세상이다. 제대로 듣자면, 아니 제대로 된 하이엔드 오디오 라이프스타일을 즐기자면 수천만 원, 수억 원을 호가하는 스피커, 앰프, DAC, 소스 기기, 액세서리를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방향을 살짝 바꿔 하이엔드 이어폰, 헤드폰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 백 만원에 이르는 이러한 하이엔드 이어폰∙헤드폰은 앞에서 언급한 하이엔드 오디오 액세서리의 하나인 케이블 한 가닥 값도 안 되지만, 박보검도 탔고 지드래곤도 탔다는 지하철 안에서는 음악 감상실을 갖춘 대부호가 부럽지 않다.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을 탐하며, 한두 달 월급을 탈탈 털어 치장한 내 두 귓구멍을 향한 세인의 시선을 한껏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셀카를 통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고스란히 옮겨진다. 물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혼 없이 클릭하고 달았을 ‘좋아요’와 ‘댓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어차피 그 이상의 관심은 받아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제 (어르신) 그 누구도 이러한 청년의 탕진잼을 무조건 나무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차적으로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고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탕진잼이 인간의 권리이자 존재의 이유라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어르신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실언을 사과하고, 청년과 함께 아파하며 아무도 아프지 않을 세상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탕진잼은 전근대적인 도덕률로 해석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슬플지언정 나쁘지 않고 안쓰러울지언정 해롭지 않다. 문제는 구조악이지 그 구조악이 견디기 힘들어 인간답게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슬프고 안쓰러운 자구책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탕진잼은 한계비용 제로, 공유경제, 프로슈머 등 새 시대의 패러다임과 닿아있다. 최저시급이나 박봉 몇 푼에 머무르고 있는 현재의 ‘탕진’은 머지않아 개개인이 가진 능력과 자질, 잠재력으로 대체될 것이다. 이러한 ‘생산의 힘’이 탕진되면서 ‘재미’와 결합할 때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내일은 저 일을 하는 세상’을 예견했다.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낮에는 낚시를 하며, 저녁에는 소를 몰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하되 굳이 사냥꾼, 어부,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바라고 기대했다. 탕진잼은 바로잡아야 할 퇴행 현상이 아니라 해석하고 실천을 이끌어내야 할 ‘지금, 이곳’의 현실이자 혁명이다.
 


김형렬
발췌_대신과 함께하는 이야기 2017 | vol.169